5억 7천짜리 SUV를 서울 도심에서 몰아봤습니다 — 롤스로이스 컬리넌 시리즈 II 시승기
롤스로이스 컬리넌 시리즈 II는 2.7톤짜리 차체가 맞나 싶을 만큼 도심에서 가볍게 움직이고, 뒷좌석은 과속방지턱을 넘어도 충격을 느끼기 어렵다. 국내 판매가는 기본형 5억 7,700만 원, 블랙 배지 6억 7,000만 원.
시동을 걸었는데 조용했습니다
계기판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엔진이 켜졌는지 몰랐을 겁니다.
6.75리터 V12 트윈 터보 엔진. 571마력. 최대 토크 86.7kg·m. 수치만 보면 야수 같은데, 막상 시동을 걸면 아무 소리도 안 납니다. 진동도 없습니다. 차 안에 앉아 있으면 그냥 정지 화면 같습니다. 엔진이 켜진 게 맞나 싶어서 문을 열고 귀를 기울였는데, 그때서야 희미하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게 컬리넌 시리즈 II의 첫인상이었습니다.
2.7톤짜리가 서울 골목길을 빠져나갔습니다
전장 5.3m, 전폭 2m에 가까운 차입니다. 주차장 입구가 보이면 솔직히 긴장하게 되는 크기입니다.
그런데 막상 좁은 이면도로에서 방향을 틀 때, 예상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움직였습니다. 사륜 조향 시스템 덕분입니다. 앞바퀴와 뒷바퀴가 함께 방향을 조절하면서 회전 반경이 실제 차 크기보다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조향 핸들도 의도적으로 가볍게 세팅되어 있어서, 도심 구간을 오래 달려도 팔이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대형 고급 SUV를 오래 몰면 운전 자체가 노동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컬리넌은 그 반대였습니다. 차가 알아서 처리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을 때
제한속도를 지키면서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았습니다.
기대했던 건 가슴을 누르는 강렬한 가속감이었는데, 실제는 달랐습니다. 대형 항공기가 활주로에서 부드럽게 이륙하는 것처럼, 묵직하고 일정하게 속도가 올라갔습니다. 강하지 않아서 무서운 게 아니라, 너무 매끄러워서 무서웠습니다. 계기판을 보지 않으면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지 감이 안 잡혔습니다.
시속 100km 이상 구간에서도 차 안은 조용했습니다. 접합 유리와 대용량 방음재가 바람 소리와 노면 소음을 차단합니다. 같은 속도에서 다른 차들이 내는 소리를 생각하면, 이 차의 방음 수준은 다른 기준에 있습니다.
뒷좌석에서 과속방지턱을 넘었습니다
이 차가 진짜 무엇을 잘하는지는 뒷좌석에 타봐야 알 수 있습니다.
조수석에서 뒤로 넘어가 앉고, 동행인에게 운전을 부탁했습니다. 차가 과속방지턱에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지나쳤습니다.
충격을 기다렸는데 없었습니다. 위아래로 살짝 흔들렸다는 느낌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에어 서스펜션과 능동형 댐핑 제어가 노면 상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해서 충격이 실내에 전달되기 전에 상쇄합니다. 일반적인 고급 SUV가 충격을 줄여서 전달한다면, 컬리넌은 충격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에 가깝습니다.
급가속, 급제동 상황에서도 뒷좌석 탑승자가 앞뒤로 쏠리는 느낌이 거의 없었습니다. 현가장치가 차체의 전후 흔들림을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덕분입니다. 롤스로이스가 이 주행감을 '매직 카펫 라이드'라고 부르는 이유를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뒷좌석 공간 자체도 넉넉합니다. 앞좌석보다 약간 높게 배치된 시트 덕분에 전방 시야가 트여 있고, 두꺼운 C필러가 측면 시선을 차단해 프라이버시도 확보됩니다. 장거리 이동을 위한 공간으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실내 — 대나무로 만든 시트가 있는 차
외관을 살펴봤습니다. 전면부는 수직 요소를 강조한 디자인입니다. DRL이 범퍼 아래까지 길게 이어지고, 범퍼 하단 라인은 V자를 그리며 요트의 선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 탑재된 23인치 휠이 전체 비율을 당깁니다.
실내로 들어서면 대시보드 상단의 일체형 유리 패널이 눈에 들어옵니다. 복잡한 버튼 없이 깔끔합니다. 아날로그 시계 아래에는 환희의 여신상이 놓인 전용 공간이 있습니다. 시동을 걸면 계기판부터 시작된 조명이 중앙 화면, 여신상 순서로 차례대로 켜집니다. 탑승 의식처럼 연출된 장면입니다.
가장 특이했던 건 시트 소재였습니다. 이 차에는 대나무 추출 원단으로 만든 '듀얼리티 트윌' 시트 옵션이 있습니다. 기존 가죽 시트와는 다른 선택지입니다. 시트 1개에 최대 220만 개의 스티치와 18km 길이의 실이 들어가고, 작업 시간만 20시간 이상 소요됩니다. 손으로 만졌을 때 부드럽고, 가죽과는 다른 결의 촉감이었습니다.
구매자 평균 나이가 43세가 된 이유
컬리넌은 2018년 처음 나왔을 때 전통적인 롤스로이스 구매층에서 우려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SUV를 만드는 브랜드가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컬리넌이 나오면서 롤스로이스 구매자 평균 연령이 56세에서 43세로 내려왔습니다. 전문 운전기사가 모는 차에서 오너가 직접 운전하는 차로 흐름도 바뀌었습니다.
시리즈 II는 이 변화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 모델입니다. 도심 기동성을 높이고, 운전석에서의 경험을 더 다듬었습니다. 동시에 뒷좌석 안락함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몰아도, 뒤에 사람을 태워도 이 차다운 경험이 유지됩니다.
가격과 선택지
모델
국내 판매가
컬리넌 시리즈 II
5억 7,700만 원~
블랙 배지 컬리넌 시리즈 II
6억 7,000만 원~
비스포크 옵션(소재·색상·내장재 커스터마이징)을 더하면 출고가는 이 기준에서 상당히 올라갑니다.
한 줄 요약: 이 차가 비싼 이유는 속도나 출력 때문이 아닙니다. 얼마나 조용하고, 얼마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지에 있습니다.